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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산황씨
남와공파
유래
내력 
昌原(檜山)黃氏 南窩公派의 유래

禦侮將軍 行守門將 諱 世喆은 昌原(檜山)黃氏 七世孫이시다.

昌原(檜山)黃氏의 始祖는 檜山府院君 諱 石奇이시다. 高麗末 忠肅王 때 元나라 公主를 輩行하고 오시어 忠肅 忠惠 忠穆 忠定 忠愍등 五朝를 섬기며 벼슬은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고 諡號는 恭僖이고 推誠佐理功臣이 策勳되어 檜山府院君에 封해지시니 이분이 우리의 始祖이시며, 後孫들이 檜山을 本貫으로 삼았다. 墓所는 黃海道 遂安郡 公浦面 岐內里에 있으나 지금은 南北分斷으로 省墓할 수 없는 實情이다.

始祖 恭僖公 諱 石奇의 次子 正順大夫知平州事 贈通憲大夫刑曹叅議 平州公 諱 昌이 五代祖이시고 大興縣監 贈資憲大夫兵曹判書 大興公 諱 善慶이 高祖이시며 그의 三子 善工監正 贈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監正公 諱 禮軒이 曾祖이시며 朝鮮朝 十九名將 中의 一人이신 兵曹判書 諡莊武公 諱 衡이 祖父이시다. 公은 莊武公의 長子인 司贍寺 副正公 諱 瓚과 妣 淑夫人 全州李氏 사이의 三男이시다.

諡禦侮將軍 行守門將 諱 世喆 號南窩인 公은 어려서부터 힘이 남보다 越等하시고 智略이 빼어났으며 慷慨하고 志操가 있었다. 宮城守門將에 勤職時 壬辰倭亂이 勃發하자 倡義하여 摠管에 運糧官으로 서울로부터 南下하여 兵使 黃進 姜熙悅 李宗仁 李潛등과 함께 敵과 奮戰하시다가 晉州城 싸움에서 殉節하시니 宣祖二十六年癸巳一五九三年 陰六月 二十九日이다. 妣이신 淑夫人平山申氏는 悲報를 접하자 아들 治謹에 當付하시기를 죽음은 나라에 忠義니 아버지의 뜻을 이어라 하시며 七日동안 飮食을 끊다가 殉節하신 節義에 찬 烈婦이셨다.

贈通政大夫折衝將軍僉樞府事 字 敏行 號 慕軒 諱 治謹은 後日 南下하여 晉州城 戰迹地를 둘러 父君의 遺骸를 찾아서나 찾지 못하니 이때가 宣祖三十三年 庚子一六00년 公의 春秋十八世이였다. 公은 歸鄕하지 못하고 轉轉하시다가 東萊府를 거쳐 靑松府使再從兄致誠의 任所를 찾아가 그곳에서 叅奉嚴彦良의 女와 婚姻을 하였다. 當代統營統制使具仁逅는 姑壻라 그곳을 찾으니 着足 無處한 公을 鎭田面 林谷里에 집과 田庄을 마련하여 定着하게 하였다. 後日 具仁逅가 還朝하여 狀啓로 禀申하니 蔭官通政大夫折衝將軍僉樞府事에 贈職되었다. 이곳에서 公과 妣淑夫人寧越嚴氏는 一淸 一駿 一鶴 一徵등 4남4녀를 膝下에 두어 一家를 이루니, 오늘날 우리 家門 南窩公 後孫의 四百餘年 世居地가 되었다.

二十二世孫 甲其

창원(회산)황씨 남와공파의 유래

어모장군 행수문장 휘 세철은 창원(회산)황씨 칠세손이시다.

창원(회산)황씨의 시조는 회산부원군 휘 석기이시다. 고려말 충숙왕 때 원나라 공주를 배행하고 오시어 충숙 충혜 충목 충정 충민등 오조를 섬기며 벼슬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이르고 시호는 공희이고 추성좌리공신이 책훈되어 회산부원군에 봉해지시니 이분이 우리의 시조이시며, 후손들이 회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묘소는 황해도 수안군 공포면 기내리에 있으나 지금은 남북분단으로 성묘할 수 없는 실정이다.

시조 공희공 휘 석기의 차자 정순대부지평주사 증통헌대부형조참의 평주공 휘 창이 오대조이시고 대흥현감 증자헌대부병조판서 대흥공 휘 선경이 고조이시며 그의 삼자 선공감정 증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 감정공 휘 예헌이 증조이시며 조선조 십구명장 중의 일인이신 병조판서 시장무공 휘 형이 조부이시다. 공은 장무공의 장자인 사섬사 부정공 휘 찬과 비숙부인 전주이씨 사이의 삼남이시다.

시어모장군 행수문장 휘 세철 호남와인 공은 어려서부터 힘이 남보다 월등하시고 지략이 빼어났으며 강개하고 지조가 있었다. 궁성수문장에 근직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하여 총관에 운량관으로 서울로부터 남하하여 병사 황진 강희열 이종인 이잠등과 함께 적과 분전하시다가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시니 선조이십육년계사일오구삼년 음육월 이십구일이다. 비이신 숙부인평산신씨는 비보를 접하자 아들 치근에 당부하시기를 죽음은 나라에 충의니 아버지의 뜻을 이어라 하시며 칠일동안 음식을 끊다가 순절하신 절의에 찬 열부이셨다.

증통정대부절충장군첨추부사 자 민행 호 모헌 휘 치근은 후일 남하하여 진주성 전적지를 둘러 부군의 유해를 찾아서나 찾지 못하니 이때가 선조삼십삼년 경자일육00년 공의 춘추십팔세이였다. 공은 귀향하지 못하고 전전하시다가 동래부를 거쳐 청송부사재종형치성의 임소를 찾아가 그곳에서 참봉엄언량의 여와 혼인을 하였다. 당대통영통제사구인후는 고서라 그곳을 찾으니 착족 무처한 공을 진전면 임곡리에 집과 전장을 마련하여 정착하게 하였다. 후일 구인후가 환조하여 상계로 품신하니 음관통정대부절충장군첨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이곳에서 공과 비숙부인영월엄씨는 일청 일준 일학 일징등 4남4녀를 슬하에 두어 일가를 이루니, 오늘날 우리 가문 남와공 후손의 사백여년 세거지가 되었다.

이십이세손 갑기